남한산성
날짜 : 2010년5월30일
날씨 : 맑음
산행코스 : 남한산성 역사관- 동문-동대장터-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동문
남한산성 도립공원 홈 : http://www.namhansansung.or.kr/index.jsp
남한산성소개 :
종 목 사적 제57호
면 적 528459.47㎡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시 대 조선시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남한산성 중앙주차장
중앙주차장옆쪽에 위치한 콘테이너를 개조한 솔바람 책방
로터리 주차장쪽으로 향한후 산성마트에서 음료와 먹거리를 구입후 다시 중앙주차장쪽으로 향하여 동문 방향으로 ~
로터리 주차장이나 중앙주차장에서 걸어서 약15분정도면 충분히 동문에 도착할수있음
동문
벌봉 방면으로 향해야 동장대터 방면으로 향할수있음
길을 잘 모르겠다면 동문을 올라서 성곽을 따라서 걸으면 됨
동문
여기서부터 동장대터까지 오르막이 계속됩니다.
송암절 안내글
성곽
장경사
동문에서 약900m 동북쪽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경내가 넓은 사찰이다. 보에는 산성특유의 철쭉이 일품이고 가을에는 소나무숲에서 송이가 난다.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세웠으나, 현 건물은 대부분 근래 재건축한 것이다.
군포지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중정남한지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125개소의 군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나, 현재는 한군데의 군포도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이 군포지는 부변보다 약간 높은 평탄한 대지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보이는 초석과 벽체, 그리고 다수의 와편과 조총탄환이 나왔다. 이를 통해 군포는 목조가구로된 건물에 기와를 얹고 벽체는 토석벽을 둘린 건물로 보인다. 또한 군포는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있고, 내부에 온돌시설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정비시에 발굴된 발굴시의 건물유구를 잘 보존하기 위하여 유구 위를 흙으로 덮고 그 위에 기존유구와 간은 형태의 모조초석을 설치하였다.
아래 사진참조
남한산성 여장의 모습
동장대터
돌탑
남한산성은 숲이 울창하고 쉼터가 많이 있다.
도시락 싸서 가볍게 가족 나들이에 적합해보였다. (단 코스는 짧게 잡을것)
북문(전승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물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명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한 것은 그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였을 것이다.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남문 수구문 총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출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날씨는 덥지만 울창한 숲으로 인해서 시원함을 느낀다.
울창한 대나무숲
서문을 통과해서 성곽 아래길도 향한다.
우익문(서문)
우익문(서문)
문을 통과하여 담 아래쪽으로 산행
성 돌틈에 끼어있는 풀들
이곳에서 수어장대방면으로 go~
300넘이 넘는 향나무
향나무 설명
수어장대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이곳 청량산에 있다.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졌으며 왼쪽에는 사당인 청량당이 있다. 뒤쪽에는 2개의 우물이 있어 장대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물을 공급하였다. 이 건물은 인조 2년(1624)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 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주 27(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 누각으로 다시 쌓고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달았다. 특히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45일 간 항전하던 곳이다. 수어장대는 아래층이 정면 5칸 측면 3칸, 위층이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양식의 이층 누각이다. 지붕은 위아래 모두 겹처마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노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가둥은 높이 60cm의 팕가장주초석 위에 올려져 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 익공식이다.
수어장대 왼쪽편
친구 승재~
수어장대에서 한컷~
수어장대 연무식 시연 행사후 퇴장모습
아래보이는 바위가 매바위
매바위에 써있는 글... 수어서대 라고 씌어있네요.
무망루
무망루 설명
청량당
이회는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로 충직한 인물인데 그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진 이후 수어장대 서쪽에 그와 부인의 영혼을 위안할 목적으로 청량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청량당'이란 이름은 서장대가 서 있는 산이 곧 청량산이므로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청량' 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건물의 가구는 굴도리식이며 주심포 양식의 기둥을 하고 있다. 본당의 중앙에는 4쪽 여닫이 격자 문을 달고 좌 우측 칸에는 높이 175cm에 정면과 측면에 창문을 각각 내었다.
청량당 대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건물인데 좌 우측의 칸은 각각 격자 문을 달아 방으로 꾸몄고 출입문 중앙은 2쪽 여닫이 대문을 달고 문 위에는 홍살을 장식하였다
남문(지화문) 가는길~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남문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남문 가는길의 성곽
남문 (산행표지판)
남문 (지화문)
지화문(남문)설명
다시 동문으로..
남문에서 동문으로 향하는 길
남옹성
남옹성 공사중
동문도착
남한산성 역사관
무형문화재 및 도자기 체험
남한산성은 가족 단위로 짧게 코스를 설정하여 산책을 나오면 좋을듯하다.
울창한 나무들과 곳곳의 쉼터... 나무그늘 아래 쉼터에서 가족들과 도시락 싸와서 쉬었다가면 좋을것같다.